우리는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인지과학자 게리 마커스는 그의 저서 '클루지(Kluge)'를 통해, 인간의 마음이 완벽한 설계의 산물이 아닌, 엉성하게 땜질된 '클루지(Kluge)'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클루지'는 공학적으로 임시방편의 해결책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마커스는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뇌가 겪었던 '진화의 흔적'들을 파헤치며, 우리 생각과 행동의 비합리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 글은 '클루지'를 읽고 깨달은 인간의 비합리성을 네 가지 핵심 주제를 통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찰하고자 합니다.
1. 덧붙여진 진화의 흔적: 비합리성의 근원
게리 마커스는 인간의 뇌가 고도로 진화된 컴퓨터가 아니라,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기능이 필요할 때마다 기존 구조에 덧붙여진 '클루지'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파충류의 뇌에 해당하는 '변연계'가 원시적인 욕구와 감정을 담당하고, 그 위에 고등 사고를 담당하는 '신피질'이 덧붙여진 구조가 바로 그 예시입니다. 마치 낡은 건물에 새로운 방을 엉성하게 증축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덧붙여진' 구조는 종종 비합리적인 충돌을 야기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감정적 반응입니다. 우리는 위급한 상황에서 이성적 판단보다 본능적인 감정(두려움, 분노 등)에 먼저 압도됩니다. 이는 진화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방식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비합리적인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 사고보다 훨씬 확률이 높은 자동차 사고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면서도, 비행기 탑승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감정적 클루지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합리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내려 애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2. 기억의 왜곡과 자기 합리화
'클루지'는 우리의 기억이 객관적인 기록 장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왜곡되는 주관적인 서사에 불과하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감정과 필요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수정하며, 특히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억을 왜곡하는 경향이 큽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일관되고 합리적인 존재로 믿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결정을 내린 후 그 결정이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을 때, 우리는 종종 "나는 원래 그런 결과를 예상했었다"라고 생각하거나,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이러한 '사후 확신 편향'은 우리의 기억이 현재의 자아상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마커스는 이러한 기억의 비합리성이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근원이 되기도 하며,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방해하는 심리적 장벽이 됩니다.
3. 선택의 비합리성: 과부하된 뇌의 한계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지만, '클루지'는 인간의 뇌가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처리하며 최적의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마커스는 인간의 사고가 '휴리스틱(Heuristics)'이라는 어림짐작 방식에 의존한다고 설명합니다. 휴리스틱은 빠르게 결정을 내리기 위한 정신적 지름길이지만, 종종 심각한 오류를 초래합니다. 우리가 자주 겪는 '선택 과부하(choice overload)'가 바로 이러한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너무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면, 오히려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최악의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또한, 우리는 이미 투자한 시간이나 노력 때문에 비합리적인 결정에 계속 매달리는 '매몰 비용의 오류(Sunk Cost Fallacy)'에 빠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재미없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면 끝까지 보려는 심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뇌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종종 비합리적인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4. 감정과 이성, 그리고 충동적인 행동
마커스는 인간의 행동이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감정적 충동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한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지만, 눈앞의 유혹(예: 맛있는 음식, SNS 알림)에 쉽게 무너집니다. 이러한 현상은 뇌의 변연계와 신피질 간의 갈등에서 비롯됩니다. 변연계는 즉각적인 보상을 추구하는 반면, 신피질은 장기적인 계획과 목표를 고려합니다. '클루지'는 이 두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협력하지 못하고, 오히려 충돌을 일으키며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킨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비합리성은 우리가 다이어트나 저축처럼 장기적인 노력을 요하는 목표에 실패하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미래의 이익을 알면서도, 현재의 작은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마커스는 이러한 충동적인 행동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적인 한계라고 말하며, 우리가 완벽한 자기 통제력을 갖추기 어려운 이유를 밝혀줍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비합리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외부적인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함을 시사합니다.
결론: '클루지'를 넘어, 더 나은 나를 위한 해법
'클루지'는 인간의 비합리성을 냉철하게 해부하지만, 그저 한계만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게리 마커스는 이러한 비합리성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클루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첫째, 자신의 비합리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뇌의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비합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 둘째, '휴리스틱'의 함정을 경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감정적 직관에 의존하기보다, 의식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 셋째, 외부의 시스템을 활용해야 합니다. 충동적인 행동을 막기 위해 환경을 설계하거나, 객관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정을 돕는 도구(예: 체크리스트, 예산 관리 앱)를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클루지'는 우리의 자만이 아닌, 겸손함을 요구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의 민낯을 마주하게 됩니다. 완벽한 존재가 아닌, 불완전하지만 끊임없이 개선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