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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아큐정전' : 정신승리, 민중, 사회비판

by 토끼러버 2026. 1. 9.

루쉰 '아큐정전' 관련 사진

루쉰의 『아큐정전』은 중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풍자소설로, 한 개인의 우스꽝스러운 삶을 통해 민족 전체가 안고 있던 정신적 질병을 해부하듯 드러낸 작품이다. 이 소설은 단순한 인물 희화화나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오히려 루쉰는 아큐라는 인물을 극단적으로 비루하고 무력하게 묘사함으로써, 봉건적 질서와 식민지적 현실 속에서 길들여진 민중의 내면을 냉혹하게 폭로한다. 『아큐정전』이 가진 힘은 비극적 장면보다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에서 더 강하게 작동한다. 독자는 웃음 뒤에 숨어 있는 자기 합리화, 비굴한 자존심,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신 구조를 발견하게 되고, 그 순간 이 작품은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사회 전체를 겨누는 비판문으로 확장된다. 『아큐정전』은 한 시대의 병리학 보고서이며, 동시에 오늘날까지도 반복되는 정신 구조에 대한 경고문이다.

정신승리: 패배를 이기는 척하는 심리 구조

아큐라는 인물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이른바 ‘정신승리법’이다. 그는 현실에서 반복적으로 모욕당하고, 폭력을 당하며, 사회적으로 철저히 무시당하지만, 그 모든 패배를 자신의 내면에서 승리로 전환한다. 누군가에게 맞고 돌아온 뒤 그는 스스로를 “나는 너보다 고귀하다”라고 상상하며 위안을 얻고,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이 도덕적·정신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개인이 선택한 생존 전략에 가깝다. 루쉰은루 쉬는 이 정신승리를 비웃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강요된 태도인지를 드러낸다. 아큐는 저항할 힘도, 연대할 의식도, 변화를 상상할 언어도 갖지 못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는 패배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정신승리가 개인을 보호하는 동시에, 현실을 변화시킬 가능성 자체를 차단한다는 점이다. 아큐는 매번 패배하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자신의 처지를 분석하지 않으며, 구조를 의심하지 않는다. 루쉰는 이 반복을 통해 정신승리가 단순한 자기 위안이 아니라, 사회적 정체를 고착시키는 치명적인 장치임을 보여준다.

민중: 무지와 순응 속에 길들여진 집단의 초상

『아큐정전』에서 아큐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당대 중국 민중의 집합적 초상으로 기능한다. 그는 가난하고 무식하며, 권력 앞에서는 비굴하고 약자 앞에서는 폭력적인 태도를 반복한다. 이는 특정 개인의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봉건 사회와 식민지적 현실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민중상이다. 아큐는 지배층의 논리를 내면화한 채 살아가며,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억압함으로써 잠시나마 우월감을 느낀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적 폭력이 위에서 아래로만 작동하지 않고, 민중 내부에서도 재생산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특히 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아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휩쓸린다. 그는 혁명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막연히 기대하고, 결국 아무런 주체성 없이 희생된다. 이 장면에서 루쉰는 민중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민중이 스스로를 각성하지 못할 때, 혁명조차 또 다른 폭력과 착취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아큐정전』은 민중을 연민의 대상으로만 그리지 않고, 비판의 대상으로 정면에 세운다는 점에서 매우 급진적인 작품이다.

사회비판: 봉건 질서와 근대의 기형적 결합

『아큐정전』의 사회 비판은 단순히 봉건적 관습에 대한 공격에 머물지 않는다. 루쉰이 겨냥한 것은 봉건 질서와 근대가 뒤틀린 형태로 결합된 중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다. 전통적 권위는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지만, 그것을 전복할 근대적 시민 의식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철저히 고립된다. 아큐는 법과 제도, 혁명과 사상 어느 쪽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며, 그 결과 그의 삶은 언제든 제거 가능한 존재로 취급된다. 아큐의 처형 장면은 이 작품의 비판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는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고, 주변 사람들은 그 죽음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소비한다. 이 장면은 개인의 비극이 사회적 무감각 속에서 얼마나 쉽게 소멸되는지를 보여준다. 루쉰는 감정적 연출을 배제하고, 차갑고 건조한 문체로 이 장면을 처리함으로써 오히려 독자에게 더 큰 윤리적 충격을 준다. 『아큐정전』은 웃음을 통해 시작하지만, 끝내 웃을 수 없는 현실을 직면하게 만드는 사회 고발문이다.

결론적 해석: 웃음 뒤에 남는 불편한 질문

『아큐정전』은 읽는 동안 웃음을 유발하지만, 읽고 난 뒤에는 깊은 불편함을 남긴다. 그 불편함은 아큐가 특별히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의 사고방식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의 실패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 구조적 모순을 외면한 채 심리적 위안으로 버티는 태도는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루쉰는 아큐를 통해 묻는다. 우리는 정말로 패배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가. 이 작품이 고전으로 남은 이유는, 그것이 특정 시대의 중국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아큐정전』은 인간이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갈 때 사회가 어떻게 정체되고 타락하는지를 보여주는 보편적 텍스트다. 정신승리는 개인을 보호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마비시킨다. 루쉰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웃음 뒤에 남겨진 질문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현실을 직시하도록 강요한다. 바로 그 점에서 『아큐정전』은 지금도 살아 있는 사회비판 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