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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 부조리, 기다림, 존재

by 토끼러버 2026. 1. 15.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관련 사진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20세기 문학과 연극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작품으로, 인간이 세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제시한 텍스트다. 이 희곡은 사건의 진행, 인물의 성장, 갈등의 해결이라는 전통적 서사 규칙을 철저히 거부하며, 무대 위에 남겨진 것은 오직 기다림이라는 행위와 그 시간을 견디는 인간의 모습뿐이다. 베케트는 인간이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그 의미에 침묵한다는 사실을 구조적으로 구현하며, 설명 대신 반복과 정지, 공백과 침묵을 통해 존재의 조건을 드러낸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해를 통해 정복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상태를 끝까지 견디도록 요구하는 작품이다. 본 분석은 이 작품을 부조리한 세계 인식, 기다림이라는 삶의 태도, 그리고 존재의 불안정성을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해석하며, 이 희곡이 왜 여전히 현대인의 현실과 정확히 맞닿아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부조리: 설명되지 않는 세계와 무너진 인과의 질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부조리는 단순히 기이한 상황이나 비논리적 사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조리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욕망이 구조적으로 좌절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이유도 목적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을 약속했는지, 혹은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은 중단되지 않는다. 이 모순은 인간이 의미를 상실한 세계 속에서도 의미를 포기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베케트는 이 부조리를 서사적 갈등이나 철학적 설명으로 해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1막과 2막의 거의 완벽한 반복을 통해 시간의 진행 자체를 무력화한다. 하루가 지나고 나무에 잎이 하나 더 붙었을 뿐, 인물들의 인식과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인과관계는 작동하지 않고, 행위는 결과를 낳지 않으며, 선택은 아무런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 이 반복 구조는 인간이 기대하는 합리적 세계 질서를 정면으로 붕괴시킨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부조리는 세계가 이해 불가능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 욕망 자체가 허공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보여주는 형식적 전략이다.

기다림: 결단을 유예하며 소모되는 삶의 형식

이 작품에서 기다림은 단순한 시간 보내기가 아니라,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로 제시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수없이 떠나겠다고 말하지만, 끝내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내일을 말하며 오늘을 유예하고, 고도가 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현재를 견딘다. 기다림은 희망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행동을 중단시키는 장치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대신, 외부의 어떤 계기를 삶의 전환점으로 설정함으로써 현재의 무력함을 정당화한다. 베케트는 기다림을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자기기만으로 묘사한다. 기다리는 동안 인간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살지 않는다. 기다림은 삶을 준비하는 상태가 아니라, 삶을 연기하는 상태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시간은 흘러가지만 축적되지 않고, 경험은 쌓이지 않으며, 존재는 소모된다. 그럼에도 인물들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다림을 멈추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현재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기다림이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도, 인간이 왜 끝내 기다림을 놓지 못하는지를 냉정하게 드러낸다.

존재: 함께 있지 않으면 붕괴되는 불안한 인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관계는 연대나 우정보다는, 혼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동반에 가깝다. 그들은 서로에게 짜증을 내고, 비난하며, 헤어지겠다고 말하지만 결국 같은 자리에 남는다. 이 관계는 인간이 타인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준다. 인간은 자율적 주체로 존재하기보다, 타인의 존재를 통해 겨우 자기 존재를 유지한다. 함께 있음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의존이다. 포조와 러키의 관계는 이러한 의존이 어떻게 폭력적 구조로 전환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배와 복종이라는 왜곡된 관계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떠나지 못한다. 이는 인간관계마저도 부조리의 일부임을 의미한다. 베케트는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이상화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며, 서로에게 매달려 살아가는 존재로 그린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존재는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란 무너질 듯한 상태로 계속 남아 있는 것, 사라지지 않고 버티는 것에 가깝다. 이 작품은 인간 존재가 얼마나 불안한 균형 위에 놓여 있는지를 침묵과 정지로 증명한다.

결론: 의미 없는 세계에서 계속 남아 있다는 것의 의미

『고도를 기다리며』는 끝내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고도는 오지 않고, 인물들은 같은 자리에 남아 있으며, 기다림은 계속된다. 그러나 바로 이 미완결성 속에서 이 작품의 철학적 힘이 발생한다. 베케트는 인간에게 희망을 약속하지도, 절망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의미 없는 세계 속에서도 인간이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다림은 허망하지만, 그 기다림 속에서도 인간은 말을 하고, 기억을 더듬고, 타인의 존재를 확인한다.『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는다는 것은 고도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고도가 오지 않는 삶을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직시하기 위함이다. 이 작품은 인간에게 어떤 대답도 주지 않지만, 가장 정직한 질문을 남긴다. 의미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베케트는 그 질문 앞에서 침묵한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인간은 오늘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기다린다. 바로 그 지속 자체가 『고도를 기다리며』가 말하는 인간 존재의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