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년의 연쇄살인범이라는 급진적인 시점을 채택해 기억과 망각, 죄와 책임, 사랑과 폭력이라는 상호 모순적 주제를 동시에 끌어안는다. 이 작품은 범죄 서사의 틀을 빌리지만 한 장 한 장을 넘길수록 스릴러의 흥분보다 인식론적 불확실성의 차가운 감각을 더 강하게 남긴다. 내러티브는 믿을 수 없는 화자의 단편적 기록, 시간의 비약, 자기 검열과 자기기만의 미세한 어조 변화로 이루어진다. 독자는 노인의 수첩과 독백을 따라가며 사실과 착각, 과거와 현재, 보호와 공격의 경계를 끊임없이 재설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소설은 “우리는 기억하는 만큼만 책임지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독자 개인에게 반환한다. 살인의 기술과 생활의 규율을 동일한 문장 호흡으로 적어 내려가는 노인의 문체는 오싹하게 차분하며, 그 차분함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양가성이 서늘하게 드러난다. 특히 가족을 지키려는 본능과 파괴의 충동이 같은 근육에서 움직인다는 진실은 읽는 이를 불편하게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작품의 도덕적 강도다. 이 소설은 “기억이 사라지면 죄도 사라지는가”라는 난제를 스릴러의 속도로 밀어붙이다가 문학의 깊이로 급강하시킨다. 그래서 '살인자의 기억법'은 단지 잘 만든 장르소설이 아니라, 망각의 시대에 죄와 책임을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현대 한국문학의 중요한 성취로 남는다.
망각의 서사, 혹은 책임의 마지막 좌표를 묻는 질문
이 작품의 첫 문장은 독자를 과거의 냄새와 현재의 그림자로 동시에 끌어들인다. 노인은 살아남는 요령을 일기처럼 적어 두었고, 그 메모는 그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으로 남아 있는지를 증언한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라는 설정은 그 증언의 신빙성을 상시적으로 훼손한다. 독자는 기록자와 기록의 간극, 화자의 말투에 숨어드는 작은 혼동, 동일한 사건을 반복 기술하는 습관과 누락의 패턴을 통해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재구성’ 자체가 소설의 주제와 겹친다는 사실이다. 법과 윤리의 장에서는 사실의 재구성이 판결을 좌우한다. 이 소설은 그 재구성의 의지 자체가 얼마나 취약한 기초 위에서 서 있는지를 드러낸다. 망각은 단순한 정보의 결여가 아니라, 자기 면죄 혹은 자기 단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노인이 딸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새로운 위험을 추적하는 동안, 독자는 그 사명감이 보호의 얼굴을 한 폭력인지, 아니면 폭력의 과거를 씻어내려는 보호인지 판단하지 못한다. 여기서 김영하는 윤리적 흑백논리를 거부한다. 선과 악은 사건의 발단과 결과로 정돈되지 않으며, 인간은 동일한 순간에 두 방향으로 당겨진다. 망각이 깊어질수록 노인의 문장은 단순해지지만 의미는 멀티플렉스처럼 층위를 키운다. 읽는 이는 불안정한 증언의 해석자가 되고, 해석의 실패 가능성은 곧 그가 감당해야 할 공동의 책임으로 전화된다. 특히 일상과 범죄의 문체적 등가—예를 들어 산책 코스의 기술과 시체 처리의 단계가 동일한 리듬으로 서술되는 지점—는 독자로 하여금 ‘악’이 특별한 의식이 아니라 반복 훈련된 습관일 수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습관이 기억을 대체할 때, 기억에 기대어 설계된 윤리 체계는 어디에 닻을 내릴 것인가. 서론에서부터 소설은 이 질문을 독자의 손에 쥐여 주고, 그 손이 덜덜 떨리도록 만든다.
믿을 수 없는 화자, 파편화된 시간, 그리고 윤리적 지각의 훈련
본론의 핵심은 형식과 주제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화자의 신뢰가 무너질수록 이야기의 추격전은 빨라지고, 추격이 빨라질수록 독자는 더 많은 판단을 즉석에서 내려야 한다. 이때 서사는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첫째, 범죄 스릴러의 기호학이다. 노인의 시선이 포착하는 작은 반복, 예컨대 타인의 발소리 리듬과 차고의 냄새, 쓰레기 배출 요일 같은 생활의 패턴이 증거의 대용물로 기능한다. 둘째, 병의 진행으로 인한 시간 인지의 와해다. 특정 인물과 사건의 전후 관계가 뒤섞이고, 과거의 살인이 현재의 위협과 중첩된다. 독자는 사실과 감각의 충돌을 조율해야 한다. 셋째, 돌봄과 폭력의 경계가 흔들리는 윤리의 영역이다. ‘지킨다’는 동사가 언제 ‘제거한다’로 전이되는지를 파악하는 감수성은 단번에 획득되지 않는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이 감수성을 훈련하도록 문장을 배열한다. 이를테면 노인이 딸의 연인을 의심하는 이유가 객관적 위험 징후인지, 아니면 기억의 구멍이 만들어낸 과잉경계인지 판단 불능의 상태를 길게 유지한다. 이 지연은 이야기의 긴장을 급상승시키지만, 더 중요한 효과는 독자의 인지적 겸손을 길러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충분한 정보 없이 타인을 판단한다. 작품은 그 ‘충분하지 않음’의 체험을 극단으로 밀어 넣어, 판단의 속도를 늦추는 윤리적 태도를 학습시키는 셈이다. 또한 문체는 눈에 띄게 건조하다. 감정의 파고를 설명하는 대신 행동과 감각을 놓아두고 독자가 의미를 조합하게 만든다. 바로 이 여백이 악의 평범성—특별한 동기 없이도, 혹은 특별한 동기처럼 보이는 일상적 합리화로도 폭력이 발생할 수 있음을—설득한다. 끝으로, 작품은 법과 문학의 시야 차를 대비시킨다. 법은 기억의 확정과 증거의 연쇄를 요구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불확정성 자체를 보여주며, 인간을 단죄하거나 면죄하지 않는 제3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기억이 사라진 자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불편하지만 생산적인 과제를 받는다.
기억 이후를 사는 법: 책임의 언어를 다시 발명하기
결론에서 이 소설은 독자에게 하나의 제안을 남긴다. 기억이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다 해도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러나 그 책임의 언어는 달라져야 한다는 제안이다. 노인의 행위는 보호와 폭력, 자기 보존과 자기 파괴의 경계에서 진동한다. 그 진동은 우리 모두의 진동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의 기억은 외주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캘린더와 사진, 로그와 CCTV에 기억을 위탁하며, 뇌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판단의 부담을 기계와 제도에 넘긴다. 그때 인간의 윤리는 더 정교해졌는가, 아니면 더 무감각해졌는가. '살인자의 기억법'은 이 질문을 개인의 이야기로 압축해 건넨다. 노인이 마지막까지 붙잡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다. 딸의 안전이라는 목표는 때로 타인의 생명을 가볍게 만든다. 하지만 그 모순이 바로 인간다움의 아이러니라는 사실을 소설은 회피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품은 선악의 승패를 가르는 결말보다, 책임을 묻는 어휘를 어떻게 갱신할 것인가를 남긴다. 우리는 타인을 판단하기 전에 증거의 빈틈을, 기억의 습관을, 문체의 냉기를 감지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 훈련이야말로 문학이 스릴러의 흥분과 별개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윤리적 이득이다. 책을 덮고 나면 남는 것은 반전의 쾌감이 아니라, ‘내 기억이 틀릴 수 있다’는 자각과 ‘그럼에도 책임은 끝나지 않는다’는 서늘한 합의다. 이 느린 합의가 독자를 오래 따라다닌다면, 이 소설은 제 역할을 완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