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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밤의 여행자들 : 멸망을 파는 여행

by 토끼러버 2025. 9. 27.

윤고은 작가는 독특하고 서늘한 문체를 통해 현실의 모순을 비트는 작품들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멸망해 가는 섬의 마지막 여행을 기획하는 한 여행사 직원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소설은 재난 소설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이기심, 자본주의의 맹점, 그리고 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은 『밤의 여행자들』이 왜 단순한 환경 소설을 넘어, 우리 시대의 가장 기괴하고도 슬픈 초상화인지 심도 있게 분석합니다.

윤고은 작가의 밤의 여행자들

'밤의 여행사'의 기묘한 상품: 종말을 소비하는 아이러니

소설의 주인공 '고니'는 멸망해 가는 섬의 마지막 순간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는 '밤의 여행사'의 기획자입니다. 빙하가 녹아 바닷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섬의 풍경, 멸종해 가는 동식물, 그리고 섬을 떠나지 못하는 원주민들의 삶은 모두 고니의 손에서 '아름다운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됩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재난과 멸망이라는 인류의 비극이 거대 자본에 의해 소비되는 상품이 되고, 사람들은 그 비극을 '관람'하며 슬픔과 감동을 느끼는 척합니다. 작가는 이러한 기묘한 설정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가 가진 잔혹한 맹점을 꼬집습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심지어는 타인의 불행까지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무감각한 현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고니는 자신이 기획한 여행 상품의 성공을 위해 섬의 비극을 더욱 극적으로 연출하려 합니다. 그의 행동은 마치 '재난 포르노'를 제작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여행객들에게 "지금 보는 이 풍경은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라고 강조하며, 멸망의 순간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합니다. 이는 독자들에게 '나는 과연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며 위안을 얻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소설은 이처럼 기묘한 설정과 서늘한 문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적 딜레마를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여행자들'의 이기심: 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

소설의 또 다른 핵심은 '여행자들'입니다. 이들은 지구의 멸망을 앞두고 마지막 순간을 특별하게 기념하려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숭고한 목적을 가진 순례자가 아닙니다. 이들 중에는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온 부모도 있지만,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슬픔을 전시하고 싶어 합니다. 멸망하는 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좋아요'를 받으려 하고, 타인의 비극을 보며 자기만족에 빠집니다.

작가는 이들의 이기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을 통해 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을 가차 없이 보여줍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재난 앞에서 서로를 구원하려는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멸망하는 섬의 풍경을 보며 진정한 슬픔을 느끼기보다,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에만 몰두합니다. 심지어는 가이드가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지역까지 무단으로 침입하며 사진을 찍으려 합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극한의 상황에 놓이더라도 본질적인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다는 슬픈 진실을 보여줍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정말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소설의 가장 소름 끼치는 부분 중 하나는, 여행자들의 이런 이기심이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윤고은 작가는 이들의 행동을 단죄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마치 일상의 한 풍경을 보여주듯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이는 독자들이 오히려 더 큰 섬뜩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우리는 소설 속 '여행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멸종 위기 동물을 보러 가거나, 전쟁의 상처가 남은 도시를 방문하는 등, 우리는 이미 타인의 비극을 소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밤의 여행자들』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날카로운 거울처럼 비추고 있습니다.

'기록'과 '남겨진 자들': 사라지는 것들의 의미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는 '기록'과 '남겨진 자들'입니다. 섬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지만,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그들의 삶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들은 떠나려는 사람들과 달리, 사라져 가는 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려 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마지막 순간을 보러 온' 여행자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이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지만, 여행자들에게는 그저 '볼거리'에 불과합니다. 윤고은 작가는 이 대비를 통해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화려하게 포장된 여행 상품이 진정한 가치일까요, 아니면 멸망 속에서도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이들의 투쟁과 기록이 진정한 가치일까요. 소설은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지만,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답을 찾아가게 됩니다. 멸망해 가는 섬의 모습은 단순히 환경 파괴의 결과물이 아니라, 인간이 잃어버리고 있는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론: 비극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불편한 성찰

『밤의 여행자들』은 독자들에게 불편하고 서늘한 진실을 던집니다. 아름다운 자연의 파괴,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자본주의의 잔혹함까지. 이 소설은 재난을 '관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재난을 '소비'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춥니다. 하지만 소설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섬에 남아 삶을 이어가는 원주민들의 모습은 소설에 깊은 감동을 더합니다. 이들은 종말 앞에서 허망한 여행을 떠나는 대신,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끝까지 지키려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 소설은 재난의 비극을 소비하는 사람들과, 그 비극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비시키며, 진정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밤의 여행자들』은 아름다운 문장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우리를 매혹시키는 동시에, 날카로운 통찰로 우리 사회의 맹점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종말의 풍경 속에서도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결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