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는 단순한 철학 입문서를 넘어, 현대 사회가 직면한 도덕적, 정치적 딜레마를 해부하는 필독서입니다. 2009년 출간된 이 책은 하버드 대학의 명강의를 기반으로, 독자를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의 현장으로 끌어들여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핵심적인 접근법, 즉 복지(Utility), 자유(Freedom), 그리고 미덕(Virtue)을 탐구하게 합니다. 샌델의 미덕 기반의 공동체주의적 시각은 존 롤스(John Rawls)의 자유주의적 평등론을 포함한 현대 주류 정의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며, 정의의 문제를 단순히 경제적 효율성이나 개인의 권리 문제가 아닌, 공동선의 관점에서 논의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분석은 샌델이 제시하는 세 가지 정의론의 핵심 논리를 전문가적 관점에서 해부하고, 왜 이 책이 현대 사회에서 필수적인 도덕적 대화의 촉매제가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1.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 복지, 자유, 미덕
샌델은 정의를 이해하는 철학적 전통을 세 가지 핵심 영역으로 구분하여 제시합니다. 이 구분은 독자들이 복잡한 철학 이론을 실제 현실 문제에 적용하고 평가할 수 있는 명쾌한 분석 틀을 제공합니다.
가. 복지 극대화 (공리주의)
정의란 사회 전체의 행복과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관점입니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과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대표적입니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며, 어떤 행위나 정책이 가져올 결과의 합산된 만족도에 따라 도덕적 가치를 판단합니다. 샌델은 공리주의의 단순성과 실용성을 인정하면서도, 소수 개인의 권리가 다수의 행복을 위해 희생될 수 있다는 근본적인 한계와, 모든 가치(인간 생명, 존엄성)를 하나의 쾌락-고통 저울로 측정할 수 있다는 오만을 비판합니다.
나. 자유 존중 (자유지상주의 및 자유주의)
정의란 개인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관점입니다. 이 영역은 두 가지 주요 조류로 나뉩니다.
-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이 대표적이며, 최소 국가를 주장하고 개인의 소유권과 선택의 자유를 절대적인 것으로 봅니다. 세금이나 복지 재분배를 강제 노동과 다름없다고 비판하며, 정부의 역할은 계약 이행과 재산 보호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자유주의적 평등론: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와 존 롤스의 정의론이 여기에 속하며,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공정성을 강조합니다.
다. 미덕 함양 (공동체주의)
정의란 공동체가 소중히 여기는 좋은 삶(Good Life)을 규정하고 미덕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관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과 샌델의 공동체주의적 접근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관점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단순한 권리나 복지 계산을 넘어,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도덕적 가치와 목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 칸트와 롤스: 의무와 공정으로서의 정의
샌델은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의 극단적인 논리를 비판한 후, 현대 정의론의 양대 산맥인 칸트와 롤스의 의무론적 접근을 분석합니다. 이 두 철학자는 정의를 행위의 결과가 아닌, 도덕적 동기 또는 공정한 절차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 칸트의 도덕 법칙
칸트에게 도덕은 실용적인 결과나 감정이 아닌 **의무(Duty)**에서 나옵니다. 진정으로 도덕적인 행위는 의무감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그 동기가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을 따를 때만 도덕적 가치를 지닙니다. 정언 명령은 첫째, 네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네가 의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라는 것이고, 둘째,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이 칸트적 관점은 인간의 존엄성을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할 근거를 제공하며, 공리주의가 개인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것을 근본적으로 반대합니다.
나.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
존 롤스는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를 주장하며, 정의로운 사회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과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이라는 가상적 상황에서 도출된 원칙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 재능, 심지어 가치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불리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다음 두 가지 원칙에 합의할 것이라고 롤스는 주장합니다. 첫째, 기본적 자유의 평등 원칙, 둘째,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입니다. 차등의 원칙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에게 가장 큰 혜택이 돌아갈 때만 허용된다고 보며, 이는 단순히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을 부분적으로 지향하는 강력한 재분배 정의론입니다.
3. 샌델의 공동체주의적 비판과 미덕의 정치학
샌델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롤스의 자유주의적 정의론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롤스가 상정한 '무지의 장막 뒤의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 가치관, 공동체적 유대를 모두 벗어던진 **'부담 없는 자아(Unencumbered Self)'**인데, 샌델은 이러한 자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고 비판합니다. 인간은 가족, 국가, 역사적 유산 등 공동체적 유대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며, 따라서 정의의 문제를 논할 때 이러한 **도덕적 유대와 공동선의 가치**를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샌델의 주장입니다.
샌델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Teleology)**을 소환하여 대안을 제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물의 목적(Telos)을 올바르게 규명하고, 그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미덕을 지닌 사람에게 영광과 인정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플루트 분배의 정의는 단순히 평등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플루트를 가장 잘 부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플루트의 목적(훌륭한 연주)이 달성되고 그 사람의 미덕이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샌델은 이러한 목적론적, 미덕 중심의 사고를 현대 정치적 딜레마(낙태, 동성 결혼, 징병제 등)에 적용합니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는 **시민들이 공통의 선에 대해 토론하고, 도덕적 가치를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숙의 민주주의**를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이는 정의가 단순히 중립적인 절차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공동체의 윤리적 판단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현대 사회에 던지는 정의의 질문
'정의란 무엇인가'는 독자들에게 윤리적 회피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샌델은 철학적 이론을 현실의 구체적인 딜레마(가격 폭리, 구제 금융, 대리 출산, 소수 집단 우대 정책 등)에 적용함으로써, 독자들이 자신의 도덕적 직관이 어떤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하게 만듭니다. 이 책이 한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도, 공동선의 가치가 점차 퇴색하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회를 원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샌델의 접근법은 정의를 단지 분배의 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인정(Recognition)과 미덕의 배분** 문제로 확장시켜 논의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독자에게 정의에 대한 쉬운 답을 주지 않지만, 정의에 대한 대화가 왜 필수적이며, 그 대화가 어떤 철학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지도(Map)를 제공하는 걸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