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은 인간의 생각, 감정, 행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며 “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KAIST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복잡한 사회 속 인간의 선택과 뇌의 작동 원리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2025년, 인공지능과 데이터 기술이 인간의 결정을 대신하려는 시대에 이 책은 오히려 ‘인간다움’의 의미를 되묻는다. 생각의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한 지금, 정재승의 통찰은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과학적 나침반이 된다.

1. 인간을 탐구하는 과학 — 뇌가 말해주는 진실
정재승 교수는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뇌를 이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감정, 판단은 결국 신경세포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열두 발자국》의 시작은 바로 이 질문이다. “우리는 왜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할까?”그는 인간의 사고가 비이성적이라는 점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뇌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직관적이고 빠른 판단(시스템 1)을 선호한다. 그래서 우리는 정보의 일부만 보고 결론을 내리고, 편향된 신념을 강화한다. 이 과정은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오류를 낳는다. 예를 들어, 투자자들이 시장 데이터를 충분히 분석하지 않고 ‘집단의 판단’을 따르는 현상, 소비자가 브랜드 이미지에 따라 품질을 과대평가하는 심리 등이 모두 뇌의 ‘인지적 지름길’ 때문이다. 정재승은 이를 “우리 뇌가 효율성과 정확성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는 본능적 노력”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보상회로(reward circuit)’의 작동 방식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과학적으로 해석한다. 도파민이 활성화되면 뇌는 기대감을 학습하고, 이는 반복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결국 우리의 선택은 자유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신경화학적 메커니즘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의 선택을 단순히 도덕이나 의지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우리의 판단은 뇌의 생존전략이며, 그 속에는 진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말은 과학이 인간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시도임을 의미한다.
2. 사회 속의 인간 — 타인과 연결되는 뇌의 이야기
《열두 발자국》의 절반은 ‘타인과의 관계’를 다룬다. 정재승은 “인간의 뇌는 사회적 연결을 위해 진화했다”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타인의 감정을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 때문이다. 누군가 아파할 때 그 고통을 우리가 함께 느끼는 이유는, 뇌 속의 신경회로가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고 감정을 시뮬레이션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회적 본능을 설명한다. 협력, 경쟁, 신뢰, 질투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모두 생존을 위한 진화적 전략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도시 뇌과학’에 대한 통찰이다. 그는 도시를 “거대한 뇌”에 비유하며, 개인의 뇌가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한다. 서울, 뉴욕 같은 대도시는 수많은 정보와 자극이 교차하는 신경망과 유사하다. 이 환경은 창의성을 자극하지만, 동시에 스트레스와 소외를 유발한다. 정재승은 “현대인은 정보의 과잉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라고 말한다. SNS, 메신저, 온라인 네트워크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뇌는 여전히 물리적 접촉과 진정한 대화를 필요로 한다. 즉,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적인 관계’는 더 중요해진다. 그는 “AI가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공감이 계산이 아닌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대목은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감정과 공감 능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일깨운다.
3. 미래를 향한 열두 발자국 — 과학이 제시하는 인간의 방향
《열두 발자국》은 단순한 뇌과학 교양서가 아니다. 이 책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를 묻는 인문학적 선언문이다. 정재승은 “미래의 가장 큰 경쟁력은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라고 말한다. AI가 인간의 기술적 능력을 넘어서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성찰하는 능력’이다. 그는 뇌과학을 통해 세 가지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용기.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안정성을 추구하지만, 진화는 늘 혼돈 속에서 이루어졌다. 변화의 시대일수록 완벽한 계획보다 ‘적응하는 유연성’이 중요하다. 둘째, 공감과 협력의 가치. 사회적 뇌는 혼자서 생존하기 어렵도록 설계되었다. 서로의 감정을 읽고, 협력하며, 집단적 지혜를 나누는 능력이 인류를 진보시켰다. 셋째, 과학적 사고의 확장. 그는 과학이 단순히 실험실 안의 학문이 아니라,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라고 말한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고하고, 감정의 영향을 인식하며,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야말로 21세기의 교양이다. 이 세 가지 원칙은 결국 “생각하는 인간(Homo cogitans)”의 회복을 의미한다. AI와 자동화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에도, ‘생각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정재승은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할을 다시 정의하도록 이끈다”라고 말한다. 즉, 과학은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힘이 아니라, 인간성을 되찾게 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결론: 뇌를 이해하면, 인간이 보인다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은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책이다. 그는 복잡한 뇌과학을 일상적 언어로 풀어내며, “우리의 생각은 뇌의 작동일 뿐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철학이 담겨 있다”라고 말한다. 2025년, 기술의 속도가 인간의 이해력을 앞서가는 시대에 정재승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은 단순히 뇌의 구조를 설명하는 교양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문적 질문에 대한 과학적 답변이다. 인간을 이해하려는 과학, 그리고 과학을 통해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 — 그것이 정재승이 우리에게 남긴 ‘열두 발자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