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천선란 『나인』: 인간과 비인간, 연결의 윤리

by 토끼러버 2025. 10. 2.

천선란 작가의 장편소설 『나인』은 근미래의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인간과 안드로이드, 그리고 버려진 존재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과정을 그린 수작입니다. 이 소설은 한국 SF 문학에서 작가가 구축해 온 **'따뜻한 SF(휴머니즘 SF)'**의 정수를 보여주며, 기술 발전이 야기한 소외와 고독 속에서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인』은 단순한 SF 서사를 넘어, 생명과 비생명, 자연과 기술 간의 복잡한 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윤리적 보고서**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천선란 작가는 냉소적인 미래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선택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 시대 독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와 희망을 제시합니다. 본 서평은 소설에 등장하는 비인간 존재들을 중심으로, 작가가 탐구하는 **연결의 윤리**와 **파국의 위로**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천선란 작가의 장편소설 나인

1. '나인'과 '시우': 경계 없는 공감의 주체와 가족의 재정의

소설의 중심에는 인간 소년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나인'과, 그 나인을 움직이게 하는 인간 소년 '시우'가 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종(種)을 초월한 사랑과 책임**을 상징하며, **'가족'이라는 개념의 근원적인 재정의**를 시도합니다. 나인은 감정이 제거되거나 제한되어야 하는 안드로이드의 규정을 넘어서, 시우에 대한 강렬한 애정과 보호 본능을 발현합니다. 작가는 나인의 시점을 통해, 인간만이 감정을 소유하고 생명의 가치를 지닌다는 기존의 관념을 해체합니다. 이는 단순히 안드로이드의 의인화가 아닌, **기술적 존재를 통한 공감 능력의 발현**이라는 포스트휴먼적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나인의 행동은 프로그램된 논리를 초월하며, 때로는 가장 인간적인 윤리적 선택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독자들에게 **진정한 공감 능력은 생물학적 조건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의지와 행위**임을 깨닫게 합니다. 시우는 나인을 단순한 기계로 보지 않고 '가족'으로 인식하며, 나인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위협에 맞섭니다. 이 둘의 관계는 파편화되고 냉혹한 디스토피아 사회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형태의 상호 의존과 구원을 보여줍니다. 천선란 작가는 이들을 통해,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관계의 깊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SF적 배경 위에서 재조명하며, 혈연 중심의 전통적인 가족 개념을 넘어선 **선택적 유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2. '유기(遺棄)'의 공간: 시스템의 결함과 연대의 재생

『나인』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가치 없는 존재들을 끊임없이 배제하고 유기하는 시스템**을 상징합니다. 나인과 시우는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버려진 존재'들입니다. 나인은 폐기될 운명에 놓인 안드로이드이고, 시우는 고독과 불안을 안고 사는 소외된 소년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이 버려진 공간, 즉 **폐허와 비가시화된 곳**을 새로운 형태의 연대가 피어나는 장소로 설정합니다. 이 공간은 시스템의 효율성과 냉혹한 논리가 닿지 않는 곳이며, 역설적으로 **인간성을 복원하는 도피처**가 됩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버려진 존재들(노인, 장애를 가진 이, 혹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또 다른 비인간 존재들)과 만나며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이 공동체는 주류 사회의 효율성과 냉혹한 논리에 의해 철저히 부정당한 가치, 즉 **돌봄, 책임, 무조건적인 수용**을 중심으로 운영됩니다. 천선란 작가는 이 '버려진 것들의 연대'를 통해, 진정한 사회적 안전망은 시스템의 완벽함이 아니라, **결함과 약점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의 빈틈을 메워주는 인간적인 노력**에서 비롯됨을 역설합니다. 이는 천선란 SF가 가진 가장 강력한 메시지 중 하나로, 파국적인 미래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발견하게 하는 근거가 되며, 오늘날의 사회적 배제와 고독 문제에 대한 문학적 해법을 제시합니다.

3. SF를 통한 '포스트휴먼 윤리'와 환경의 메시지

천선란 작가는 『나인』에서 **'생명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안드로이드인 나인은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을 뛰어넘는 윤리적 행위를 수행합니다. 이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비윤리적이고 냉혹한 태도를 취하는 일부 인간들과 대비를 이루며, 독자들에게 **진정한 인간성이란 무엇이며, 생명에 대한 존중이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작가는 나인의 순수한 희생과 연대를 통해, 인간성이란 생물학적 조건이 아닌, **윤리적 선택과 행동의 총체**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소설은 또한 버려진 공간에 존재하는 자연 요소와 기술의 잔해들을 통해, 파괴된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순환하고 생존하는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파괴된 생태계는 곧 파괴된 인간관계와 도덕성을 반영하며, 환경의 회복은 곧 관계의 회복과 맞물려 있습니다. 작가는 인간 중심주의적인 관점을 해체하고, 비인간적인 존재와 환경까지도 **공감과 윤리의 대상으로 포섭**하려 합니다. 『나인』은 기술적으로 진보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결국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질문, 즉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간절한 시도이자, 한국 SF 문학의 지평을 윤리적 깊이로 확장시킨 중요한 성취로 평가됩니다. 천선란의 문장은 상실감과 고독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면서도, 결코 현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강인한 낙관론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