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련 작가의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였던 실존 인물, 여성 노동자 강주룡의 생애를 복원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을 넘어, 작가의 치밀한 고증과 깊이 있는 상상력을 통해 식민지 시대의 계급 모순, 여성 노동자가 겪어야 했던 이중의 차별,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피어난 인간적인 연대의 의미를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우리가 잊고 있던 **여성 노동 운동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펼쳐 보이며, 독자들에게 90년 전의 투쟁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깊은 메시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1. '체공(滯空)'의 상징성: 땅을 떠난 자의 저항
소설의 핵심적인 사건이자 모티프는 강주룡이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벌인 '체공 투쟁'입니다. '체공'이란 공중에 머무른다는 뜻으로, 박서련 작가는 이 행위를 단순한 파업 수단이 아닌, **여성 노동자의 극한적인 저항과 존재론적 메시지**로 해석합니다.
강주룡은 땅바닥의 삶, 즉 부당한 노동 착취와 여성으로서의 멸시가 만연한 현실을 거부하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 체공 행위는 물리적으로는 고립을 의미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억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과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는 행위입니다. 지붕 위에서 강주룡은 일제 자본가와 식민지 경찰, 그리고 주변의 방관자들을 내려다봅니다. 땅 위에서의 모든 규율과 계급은 그녀에게 미치지 못하며, 그녀의 몸과 목소리는 오직 자신만의 투쟁 의지를 표명합니다. 작가는 이 고독하고 숭고한 체공의 시간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강주룡이 단지 '희생된 노동자'가 아니라 **불의에 맞선 가장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 '체공'은 그녀가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증명해 낸 공간이자, 역사를 향해 던진 가장 강력한 질문이 됩니다.
특히, 소설은 강주룡의 체공을 단순히 '목숨을 건' 행위로 그리지 않고, 그 행위가 가진 상징적 의미에 깊은 무게를 둡니다. 그녀가 지붕 위로 올라서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굴종하는 '여성'이나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유를 향한 의지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되찾습니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투쟁을 통해 거대한 사회적 억압에 균열을 내는 행위이며, 작가는 이를 통해 한 개인의 용기가 역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줍니다.
2. 여성 노동자의 이중 구속: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
강주룡이 겪는 고난은 단순히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노동자'로서의 계급적 착취**와 **'여성'으로서의 젠더적 억압**이라는 이중의 구속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소설은 이를 '고무 공장'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았고, 때로는 성적인 착취의 위험에도 노출되었습니다. 소설 속 강주룡의 동료 여성 노동자들은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비참한 선택을 강요받거나, 가정과 노동 현장에서 모두 억압받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박서련 작가는 강주룡의 시선을 통해 이러한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강주룡의 투쟁은 단순히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여성으로서 인간다운 삶의 존엄성**을 되찾으려는 투쟁이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곧 역사 속에서 침묵당하고 지워졌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울림이 됩니다. 이처럼 소설은 **젠더와 계급 문제가 교차하는 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하며, 현대 사회의 페미니즘적 관점에서도 매우 유효한 해석의 틀을 제공합니다.
작가는 강주룡의 내면을 섬세하게 파고들어, 그녀가 겪는 외로움과 고뇌, 그리고 자신의 투쟁이 주변인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고민을 입체적으로 그려냅니다. 이는 독자들에게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한 인간의 고뇌와 감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강주룡의 투쟁을 더욱 인간적으로 느끼게 만듭니다.
3. 고독한 영웅을 넘어, '연대'의 힘
강주룡의 체공 투쟁은 고독했지만, 그 투쟁을 가능하게 한 것은 결국 **노동자들 간의 연대**였습니다. 소설은 강주룡을 일방적인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고, 그녀를 둘러싼 동료들의 복잡다단한 심리와 행동을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체공 기간 동안 아래에서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동료 노동자들의 모습, 특히 다른 여성 노동자들이 그녀의 안전을 걱정하고 투쟁의 의지를 북돋는 장면들은 소설에 짙은 감동과 휴머니즘을 불어넣습니다. 이들의 연대는 경제적 착취와 권력의 횡포에 맞서 인간성을 지키려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또한, 작가는 강주룡의 삶을 재구성하면서, **역사적 기록에 남지 않은 주변 인물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되살려냄으로써, 한 개인의 위대한 투쟁 뒤에 존재했던 공동체의 힘을 강조합니다. 이 연대는 90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희망과 저항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회적 가치를 상기시킵니다.
소설의 문장은 서정적이면서도 힘이 넘칩니다. 박서련 작가는 역사의 빈 페이지를 감각적인 언어로 채워 넣고, 차갑게 기록된 사실들 속에 숨겨진 인물들의 뜨거운 심장을 되살려냅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전기 소설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여성 노동자의 투쟁과 연대, 그리고 존엄성에 대한 감동적인 서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