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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 멸망과 사랑

by 토끼러버 2025. 10. 4.

최진영 작가의 장편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인류에게 닥친 치명적인 바이러스 재난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사랑과 우정 그리고 연대의 가치를 탐구하는 묵시록적 로드무비 서사입니다. 이 작품은 재난 소설의 전형적인 공포나 스펙터클 대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관계의 섬세한 면모에 집중합니다. 작가 특유의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문체는 종말의 풍경을 감성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려냅니다. 특히 이 소설은 사회의 주변부 소수자들이 재난이라는 극한 상황을 통과하며 맺는 관계의 윤리를 성찰하게 합니다. 해가 지는 곳으로 가 한국 현대 문학이 디스토피아 서사를 다루는 방식에 던진 새로운 이정표이자 휴머니즘적 성취임을 이 서평을 통해 분석하고자 합니다. 작가는 파국 속에서도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 가치가 무엇인지 집요하게 질문을 던집니다.

최진영 작가의 장편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

1. 멸망이 덮친 세계 일상의 아이러니

'해가 지는 곳으로'가 묘사하는 멸망은 갑작스럽고 드라마틱한 파국이 아닙니다. 바이러스 확산으로 사회 기능이 점차 마비되고 인류가 서서히 쇠퇴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종말의 징후가 곧 우리의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생존자들은 무너진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먹고 자고 사랑하는 일상의 루틴을 기계적으로 이어갑니다. 이러한 멸망과 일상의 병치는 소설의 가장 큰 아이러니를 형성합니다. 파국이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특별한 영웅이 되기보다는 그저 오늘 하루를 버티는 소시민의 모습을 유지합니다. 이처럼 평범한 생존자들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현실적인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재난이 거대한 스케일의 서사로 치환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작고 사소한 생존 투쟁으로 그려진다는 점은 이 소설의 중요한 문학적 특징입니다. 작가는 폐허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간의 필요와 욕망 그리고 삶에 대한 집착을 건조하게 포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깊은 성찰을 유도합니다. 이기심과 폭력이 만연한 폐허 속에서도 인물들은 아주 작은 친절과 배려를 나누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 합니다. 재난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시험대에 올려놓는 거대한 실험임을 작가는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2. 종말의 로드무비와 소수자의 생존

이 소설의 서사 구조는 주인공 지이와 도리가 희망의 장소라 믿어지는 해 뜨는 곳 혹은 해가 지는 곳을 향해 끊임없이 이동하는 로드무비의 형태를 띱니다. 이동은 이 소설에서 단순히 장소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정착하지 못하는 소수자의 삶을 은유하며 재난 이전에도 이미 주변부였던 인물들의 현실을 극대화합니다. 지이는 트랜스젠더이며 도리 역시 사회의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인물입니다. 이들은 재난 이전에도 소외와 차별을 겪었던 존재들이며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도 폭력과 배제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여정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자신의 존재와 관계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고독하고 치열한 투쟁이 됩니다. 작가는 이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며 이들이 맺는 비주류적인 연대와 관계에 주목합니다. 기존 사회의 규범과 권력이 무너진 세상에서 생존의 조건은 이제 혈연이나 계급이 아닌 진정한 인간적 신뢰와 돌봄에 기반합니다. 지이와 도리가 맺는 사랑의 관계는 멸망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더욱 견고해집니다. 해가 지는 곳으로라는 제목은 희망의 상징인 태양이 뜨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소멸하는 종착점을 향해 간다는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이들이 현실적인 구원을 찾기보다는 소멸의 순간까지 함께하려는 의지를 선택함을 보여줍니다. 소수자의 사랑과 연대가 멸망을 관통하는 유일한 구원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이 로드무비를 통해 강력하게 전달합니다. 이들의 묵묵한 걸음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가장 숭고한 저항의 방식입니다.

3. '해가 지는 곳으로' 사랑과 연대

최진영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가치는 사랑과 윤리적인 연대임을 설파합니다. 지이와 도리 그리고 그들이 길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관계는 멸망이라는 배경 속에서 인간성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특히 작가의 문장은 이러한 무겁고도 아름다운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건조하고 절제된 문장 속에 담긴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선은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작가는 문장을 통해 감정을 과잉 표출하는 대신 정직하게 응시함으로써 더욱 깊은 공감과 감동을 유발합니다. 소설은 결국 종말 그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종말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과 그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적 행위를 탐구합니다. 최진영 작가는 삶이 파국으로 치닫을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지키고 서로를 돌보는 행위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저항이자 구원임을 역설합니다. 해가 지는 곳으로 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합니다. 재난은 결국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겠지만 당신은 누구의 곁에 남아 무엇을 지킬 것인가. 이 소설은 현대 한국 문학이 도달한 휴머니즘적 깊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절망 속에서도 희미한 사랑의 불빛을 발견하게 하는 힘을 지녔습니다. 이들의 여정은 해가 지는 곳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곧 새로운 시작임을 암시하며 희망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마지막 순간에 함께하는 사람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