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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홀' : 폭력 부조리 인간의 소멸

by 토끼러버 2025. 10. 5.

편혜영 작가의 장편소설 '홀'은 익숙한 일상 속에서 예기치 않은 파국을 겪은 한 남자가 겪는 신체적 심리적 해체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충격적인 서사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던 주인공 오기는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자신은 전신마비 상태라는 극한의 상황에 놓입니다. 소설은 이 물리적 장애 상태에서 비롯되는 고립과 함께 아내의 어머니 즉 장모에 의한 교묘하고 집요하며 부조리한 통제 폭력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홀'은 한국 문학의 어둡고 냉철한 계보를 잇는 중요한 작품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불안과 소통의 불가능성을 해부하고 현대 사회의 실존적 허무를 응시하게 만듭니다. 이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폭력의 다양한 형태와 정체성의 파괴 그리고 소멸해 가는 한 존재의 비극을 목도하게 합니다. 본 서평은 소설 속 신체적 심리적 홀의 다층적 상징성과 통제 폭력의 미학 그리고 주인공의 자아 해체 과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편혜영 문학의 냉혹한 리얼리즘을 고찰합니다.

편혜영 작가의 장편소설 '홀'

1. 신체적 심리적 홀의 다층적 상징성

소설 제목인 '홀'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상징이자 단순한 물리적 의미를 초월하는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주인공 오기가 간병 생활을 하는 집 마당에 덩그러니 파인 구덩이 즉 구멍을 지칭합니다. 이 구덩이는 장모가 부조리하게 수행하는 무의미한 노동의 결과물이며 오기에게는 현실 도피처이자 파국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 홀은 오기가 겪는 신체적 마비 그 자체입니다. 교통사고 이후 오기의 몸은 의식과 의지를 상실한 채 단순한 껍데기처럼 존재하며 이는 세상과의 소통이 완전히 단절된 실존적 구멍을 상징합니다. 오기는 사고 이전 전문직으로서 안정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나 마비 상태가 되면서 모든 사회적 역할과 정체성을 강제로 상실합니다. 그의 내면은 거대한 공허 즉 심리적 홀로 채워지며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의미와 부조리의 영역입니다. 이 홀은 타인의 시선과 통제가 무방비하게 침투하는 취약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편혜영 작가는 이러한 홀의 다층성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취약하고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작가는 오기의 마비된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외부 세계의 폭력과 부조리가 마비된 몸을 가진 약자에게 어떻게 가해지는지 극단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홀은 결국 오기의 삶과 존재가 외부의 힘과 억압적인 관계에 의해 파괴되고 소멸되는 비극적 과정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2. 통제와 폭력 부조리한 간병 서사와 구조적 잔혹성

'홀'이 제시하는 폭력은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보다는 훨씬 더 교묘하고 음습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바로 장모에 의한 수동 공격적이고 집요한 통제입니다. 장모는 딸을 잃은 슬픔과 함께 오기에게 딸의 죽음에 대한 잠재적 죄책감을 교묘하게 전가하며 그를 간병이라는 명목하에 감금하고 통제합니다. 장모의 간병 행위는 겉으로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오기의 자율성과 의지 그리고 인간성을 철저히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목적이 깔려 있습니다. 이는 구조적인 잔혹성을 띠며 장모 역시 과거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겪었을 억압과 희생이 오기에게 전이되어 발현되는 복잡한 폭력의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장모는 오기에게 말을 걸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오기가 싫어하는 음식을 먹이거나 마당의 홀을 파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합니다. 이는 오기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마비 상태라는 점을 악용한 가장 잔혹한 형태의 심리적 폭력입니다. 오기는 이 모든 부조리한 상황을 감각은 살아있는 채로 눈으로 목격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합니다. 소설은 장모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는 부조리의 극단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인간관계 속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 권력과 통제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이 간병 서사는 사랑이나 보살핌의 미덕이 아니라 증오와 통제 그리고 복수가 뒤섞인 현대 사회의 어둡고 병든 단면을 응축하여 보여줍니다. 오기는 장모의 통제 속에서 점차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잃고 단순한 사물 즉 돌봄의 대상으로 전락해 갑니다.

3. 해체되는 자아와 실존적 고립의 언어

오기는 마비와 장모의 통제를 겪으며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이 점차 해체되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사고 이전 그는 직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누리던 모범적인 사회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고 후 그는 사회적 직위 경제력 심지어 배우자와의 관계까지 모두 상실합니다. 그를 규정하던 외부의 모든 요소들이 사라지자 오기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마비된 몸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외부로 표출할 수 없게 만들며 오기는 자신의 내면에 갇힌 완벽한 실존적 고립 상태에 놓입니다. 언어와 소통의 상실은 오기의 고립을 완성하는 마지막 쐐기가 됩니다. 편혜영 작가는 이 고립된 내면의 풍경을 밀도 높은 문체로 그려냅니다. 오기의 의식의 흐름은 종종 파편화되고 불안정하며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듯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오기의 심리적 혼란에 동참하게 됩니다. 오기는 눈 깜빡임이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마지막까지 자신의 주체성을 되찾으려 시도하지만 장모는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오해하며 그의 소통 시도를 좌절시킵니다. 소설은 결말에 이르러 오기가 자신의 몸과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는 듯한 일종의 체념 혹은 초월적 상태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자아의 소멸을 통한 부조리한 화해에 가깝습니다. 홀은 인간 존재가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 요소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지를 냉혹하게 고발하며 멸망을 향해가는 한 개인의 서사를 통해 현대인의 깊은 내적 공허를 대변하는 중요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인간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가장 냉철하고 정직한 문학적 답변 중 하나입니다.